소리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IVF 학사회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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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3-06-12 조회4,858회 댓글0건

[소리정음]
늙으신 나의 할머니 [복되어라, 돌보는 이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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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https://youtu.be/w6qcTWGCYek 

[소리] 2022 다섯 번째 소리 10+11호(통권264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복되어라, 돌보는 이들이여!


작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한 20대 청년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청년 혼자서 아버지를 돌보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발생한 비극이었습니다. 

독박육아, 독박간병 등, 돌봄을 개인이 오롯이 감당하는 현실을 풍자하는 신조어입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는 데는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와 사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기가 필요한 계절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돌보는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돌봄의 연대기  





https://youtu.be/w6qcTWGCYek 

늙으신 우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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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명

* 필자와의 협의로 익명을 사용합니다




우리 할머니는 1932년생으로, 올해 91세다. 보통의 노인들이 그렇듯 할머니도 이제 거동이 불편하고 치매를 앓고 계시다. 지금은 증세가 심하지 않아서 가족들을 못 알아보거나 ‘치매’하면 흔

히 떠오르는 ‘벽에 똥칠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귀가 많이 안 좋고 조금 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가 고집이 세다. 이런 사람과 함께 사는 건 생각보다 답답하고 힘들다. 힘들다는 단어가 주는 무게보다 더.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굉장히 건강하셨다.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 친구들과 산에 올랐고(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집 앞에 있는 작은 밭을 가꾸면서 농작물을 수확하고, 취미로 장구를 배우고, 친구들과 주기적으로 여행도 다녀오셨다. 때가 되면 청국장과 메주를 만들고 간장을 달이셨으며, 당신이 직접 키운 고추와 무, 배추로 김장도 하셨다. 그때의 할머니는 어렸던 나보다도 더 바쁘게 지내셨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이가 들면 몸에 힘이 빠진다. 할머니에게도 그런 시간이 다가왔다. 내가 대학 다니느라 집을 떠나있었을 동안 할머니는 꽤 자주 넘어졌고 그때마다 어딘가 다치셨다. 사람이 그 나이에 다친다는 건 다치는 것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주 오래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것임을 나는 그때 알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집에 가도 할머니가 안 계셨고 그게 점점 당연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병원에서 지내던 할머니에게 치매까지 찾아왔다. 병원에 입원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코로나가 터졌다. 늘 퇴원하고 싶어 하셨던 할머니는 당신의 바람과는 달리 병원에 오래 계실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은 할머니를 곧 요양원으로 모신다고 했다. 나는 그때 ‘앞으로는 할머니와 절대 같이 살지 않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생각과는 달리 할머니는 올해 4월, 집으로 돌아오셨다. 할머니 본인이 요양원에 가는 걸 극구 거부하셨다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가시는 게 안 된다면 다른 대안이 뭐가 있을까 살펴보았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에 따르면 장기요양 급여는 시설 급여와 재가 급여, 그리고 특별현금 급여로 나뉜다. 시설 급여는 일상생활이 어려운 노인에게 요양 시설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앞에서도 말했듯 요양원에 가는 건 할머니가 거부하셨다. 재가 급여는 주로 집에서 이루어지는 복지 서비스를 말한다. 방문 목욕, 방문 간호, 주야간 보호가 그것이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요양사가 집으로 오는 건 엄마가 반대했다.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시기 며칠 전, 부모님은 나에게 할머니가 곧 집으로 돌아오실 거라고 얘기했고 여러 주의사항 같은 걸 말씀하셨다. 나는 그때 부모님 말씀을 별로 귀담아듣지 않았다. 첫째는 할머니를 돌보는 일이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할머니와 같이 사는 걸 그리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곧 알게 됐다. 4월부터 우리 가족은 할머니와 다시 같이 살았다. 할머니를 돌보는 건 전적으로 아빠가 맡았기 때문에 내가 할 일은 크게 없었다. 그렇다 해도 아픈 사람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내가 생각한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할머니의 몸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고집은 여전했다. 늘 밖에 나가려 했고 부엌에 들어가서 뭘 자꾸 하려고 하셨다.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에게 밖은 할머니를 넘어지게 만드는 것투성이였고, 부엌도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위험한 곳이었다. 밖에 나가지 말라고, 부엌에 들어가지 말라고 수천 번 말을 해도 할머니는 귀가 안 좋고 기억도 잘 못 하시는 데다가 고집은 세서 잠깐 한눈파는 사이에 일을 저지르셨다. 그래서 집에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의 사람이 있어야 했다. 활동반경이 넓지 않은 사람 곁에 꼭 붙어있어야 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번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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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가꾸시던 작은 텃밭
 


지난 여름, 엄마 아빠에게 가족 여행을 제안했는데, 할머니 때문에 못 간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가족끼리 외식도 못 했다. 할머니가 잘 못 움직이시니까. 할머니와 오래 살았어도 유대감은 깊지 않아서, 뭘 하자고 할 때마다 할머니 때문에 안된다는 말을 들으니 할머니에게 짜증이 났다. 심지어 할머니가 이기적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양심이 있으면, 남은 사람들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요양원에 가지 않고 집에 남아서 가족한테 피해를 주는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도 위에 말한 것들은 약과였다. 할머니와 같이 살면서 제일 참기 힘든 건 오물이었다. 화장실에 가기 어려워하는 할머니를 위해 할머니 방에 간이 변기를 설치해두었는데, 제때 치우지 않으

면 온 집안에 냄새가 퍼졌다. 나는 냄새뿐만 아니라 간이 변기를 치우는 걸 보기만 해도 비위가 상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별고 알고 싶지도 않지만) 종종 거실 바닥이나 변기에 오물이 묻어있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할머니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할머니를 요양원에 보내고 싶었다.


그러던 중 최근에 시설 자체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엉뚱하게도 장애인 이동권 시위를 보면서 장애인 인권에 대해 생각했고, 그 생각이 그들이 거주하는 시설에까지 가닿은 것이다. 시설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할머니를 시설에 보내고 싶어 하는 게 맞는 생각인지 고민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좋은 시설이란 없다”라고 했다. 시설에서 일어나는 폭행이나 방임은 명백한 인권침해가 맞지만,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시설 자체가 인권침해가 일어나는 곳이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대부분의 시설에서는 한 방에 여러 명이 단체 생활을 해야 하고, 본인 뜻대로 외출할 수도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 이유에서 미국과 유럽에서는 1960년대부터 ‘탈시설’ 정책이 시행되었다고 한다. 탈시설은, 쉽게 말해서, 시설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지역 사회로 자립시키는 것을 말한다. 탈시설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아픈 사람들이 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정책이 마련되어야 하고, 지역사회가 아픈 이들과 같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몇 년 전부터 탈시설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긴 하지만 찬반 의견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논의를 접한 지 얼마 안 된 내가 탈시설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설에서 어느 정도 인권침해가 이뤄진다는 걸 인지하고서도 할머니를 시설에 보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질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상황은 바뀌지 않아서 여전히 힘든 건 사실이다.


할머니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늙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삶에 큰 미련이 없는 나는 사람들이 늙어서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할 때까지 사는 심정을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낯선 곳이 아닌 내가 살던 곳에서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마음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요양원에 가는 걸 거부했던 할머니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나 자기 삶의 방식을 정할 권리가 있다는 걸 아주 어렵게 받아들이고 있다.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은 없으니까 그걸로 미워하지도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아주 어렵게 깨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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