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IVF 학사회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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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3-06-12 조회2,267회 댓글0건

[소리정음]
돌봄의 연대기 [복되어라, 돌보는 이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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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https://youtu.be/ZBg_c7Yt5HY 

[소리] 2022 다섯 번째 소리 10+11호(통권264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복되어라, 돌보는 이들이여!


작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방치해 사망에 이르게 한 20대 청년 사건이 알려졌습니다.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청년 혼자서 아버지를 돌보다 생활고를 견디지 못해 발생한 비극이었습니다. 

독박육아, 독박간병 등, 돌봄을 개인이 오롯이 감당하는 현실을 풍자하는 신조어입니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는 데는 개인을 넘어서 공동체와 사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과 그들을 돌보는 이웃들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기가 필요한 계절입니다. 우리 곁에 있는 돌보는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세요.


 돌봄의 연대기  





https://youtu.be/ZBg_c7Yt5HY 

돌봄의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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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xabay.com

                                                                                                                                                                                               



◆ 익명

* 필자와의 협의로 익명을 사용합니다




나는 돌보는 것에 재주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재난과도 같은 일이 벌어졌는데, 그것은 스스로를 챙기기도 벅찬 나에게는 선을 넘는 도전이었다. 바로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었다.


나의 할머니


내가 대학생 때의 일이다. 한평생 가족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하던 할머니가 넘어지시면서 꼬리뼈에 금이 갔다. 연세 90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하시던 할머니의 자동화 시스템이 결국 멈추었다. 할머니는 침대에 종일 누워서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셨다. 평생 누군가를 돌보기만 했지 돌봄을 받아본 적 없던 할머니는 요강 하나만 두고 모두를 물리셨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요강에 소변을 보려던 할머니가 요강과 함께 넘어지며 소변 위로 뒹굴었다. 그 모습을 목격한 나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일차적으로는 역했고, 소변 위를 뒹군 할머니가 느끼셨을 치욕과 허탈함, 미안함이 소변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와 같이 나를 덮쳤다.


할머니는 그 사건 이후로 기저귀를 차셨다. 그 모든 수발은 엄마의 손을 거쳤다.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일은 내게도 빈번히 일어났다. 거실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던 나의 귓가에 이름을 부르는 나지막한 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실처럼 가늘고 불어터진 우동 면처럼 힘없이 툭툭 끊겼다. 집에는 나와 할머니뿐이었다. 나는 비적비적 몸을 일으켰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천근만근이었다. 할머니는 척척한 눈에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나를 쳐다보셨다. 나는 숨을 멈추고 할머니의 기저귀를 갈아치웠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 소름의 출처는 한 단어로 정리하기가 어렵다. 할머니는 그런 나에게 “착한둥이야, 아이고, 이 착한둥이야”라고 말씀하셨다.


착.하.다. 착한 것은 무엇일까. 그저 끝없이 인내하는 것일까? 나는 할머니의 그 가느다란 목소리를 모른 척하고 싶었다. 내 안에서 두 가지 마음이 끝없이 싸웠다. 지금 내가 외면하면 가족 중 누군가가 할 일이었다.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회피하지 못한 나는 할머니를 돌보는 일에 겨우 몇 할을 가담했다. 그것마저도 나 자신과 계속 싸웠다. 그것은 끝없이 자기혐오에 빠지는 일이었다. 나를 한평생 보살펴주신 나의 할머니께 이 정도의 보살핌도 어려워서 회피하려는 내 모습과 계속 싸워야 했고 계속 부딪쳐야 했다. 드라마에서 보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아름다운 장면들이 현실에서는 끝없이 소름 돋고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일이었다.


더 이상 집에서 할머니를 돌보기가 어려워졌다. 결국 할머니가 요양원으로 가게 되었을 때 묘한 해방감이 일었다. 그것이 묘했던 것은 해방감에 수반된 자책감 때문이었다. 내가 할머니의 똥 기저귀 가는 일을 어려움 없이 해냈더라면, 할머니의 몸을 젖은 수건으로 꼼꼼히 닦으며 살뜰히 보살피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지 않았더라면, 어린 아이와 다름없이 변한 할머니를 돌보는 것이 힘들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더라면….


요양원에 할머니를 뵈러 갔을 때, 나는 좀처럼 할머니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오래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려웠다. 아주 잠깐 보는 것만으로도 할머니가 얼마나 우리를 그리워했는지 보였기 때문이다. 언니는 눈물을 보였다. 나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언니는 할머니가 다시 집으로 오길 바랐다. 그 말에 난 호응하지 못했다. 요양원 앞마당의 화단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화단을 보호하 

는 벽돌 위에 서서 중심을 잡으며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쪽은 꽃으로 가득한 화단이고 한쪽은 흙이 가득한 콘크리트였다. 꼭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것 같았다.

곧 봄이 올 것이다. 


할머니는 목련을 아주 좋아하셨고, 목련이 피는 따뜻한 봄날이 되면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오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몇 주가 지나고 종종 할머니를 뵙고 또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할머니는 깊은 잠에 드셨다. 목련이 피기 전, 봄이 곧 돌아올 채비를 하던 날이었다.


나의 조카


남동생이 임신한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왔다. 나는 생판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식구로 맞이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순하고 어여쁜 아이가 세상 빛을 보았다.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아직 어렸던 남동생 부부는 무엇 하나도 책임지지 못했다. 미숙하고 어리숙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아기를 돌보는 일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늘어났다.


회사에 있는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발작으로 동생이 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그 전날 심한 몸살을 앓았고 다음 날 내가 회사에 출근한 사이 갑작스럽게 발작을 일으켰다. 동생은 병원에서도 계속 발작을 일으켰다. 잠시 차도를 보여 정신을 차렸을 때 과한 발작으로 침대에 온몸이 묶여서 산소 호흡기를 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괜찮다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말했고 동생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잠이 들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한 달간 병원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동생은 끝내 무지개 너머로 건너갔다.


남겨진 아이를 동생이라 생각하며 돌보기 시작했다. 조카를 돌보는 것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나의 일상에 침투했다. 그 전에도 아이의 엄마는 나에게 아이를 맡기고 때때로 약속을 어겨 새벽까지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마다 업어서 노래를 부르고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끝나지 않는 피로감에 구토감이 일고 출근해야 하는 내일이 버거웠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일을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하는 현실이 억울하고 분했다. 눈물을 퐁퐁 떨구며 잠이 들려던 찰나, 술에 취한 아이의 엄마는 불쑥 내 방으로 들어와 아이를 안고 나가버렸다. 분노와 허탈감이 일었다. 눈을 감고 되는대로 뱉어냈다. 제발 나에게 감당할 만한 시련만 주시기를, 지금의 나의 삶이 너무 버거우니 내 짐을 다 가져가 주시기를….


아이의 엄마는 끝내 집을 떠나갔다. 나와 엄마, 아빠 그리고 조카만이 남겨져 가족의 울타리를 고쳐지었다. 모든 일상의 중심이 조카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유치원에서 챙겨야 하는 것들, 학교에 갈 준비, 학교에 가서 드러나는 문제점들을 해결해야 했다. 조카는 불안이 높았고 시력이 아주 나빴으며 경미한 ADHD가 있었다. 엄마와 나는 아픈 아버지를 대신해 아이의 심리적 안정과 학업을 위해 무던히도 애썼다. 집중력이 심히 떨어지는 아이의 모습을 살피며 정신과에서 상담을 받고, 심리치료와 난독치료를 받고, 세심하게 관찰하며 돌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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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돌보는 일은 나의 성숙을 동반하는 일이었다. 아이와 부딪치면서 하나둘 드러나는 나의 약함과 악함을 다른 말로 애써 포장하며 외면하곤 했다. 미숙하여 부글부글 끓어대는 화는 결국 흘러넘쳐 서로를 다치게 했다. 나는 달라져야 했다. 내 수준에서 하는 생각 말고 아이의 시선에서 아이가 원하던 그 한마디가 무엇이었을까 고민하고, 화를 내기 전에 한번 멈춰 서서 머리를 식히고 대화하려고 노력했다. 나를 둥글게 마모하는 과정은 언제나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가치 있는 일이었다. 


완벽한 가족도 아니고 여전히 성숙한 어른이 되진 못했어도 하루하루 많은 이야기가 담긴 날들이 지나 아이는 성장해 간다. 그것은 내가 성장해가는 과정이다. 아이와 우리 가족은 총 열 번의 사계절을 보내는 중이다. 그동안 많은 것들이 시들고 또 아름답게 피어나는 것을 보고 경험하며 그렇게 자라고 있다. 나 혼자서 누군가를 돌보는 것이 아닌 그 역시 나를 돌봐주고 있음을 느낀다. 나를 성숙시키고 내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작은 아이였고, 그것은 아이가 나를 돌보는 일이었다. 아이는 항상 나와 놀기를 원하고 나의 일을 방해하기 일쑤다. 하지만 그 아이가 있기에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목표가 생겼고, 내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소아마비를 앓으셨다. 그 시절 열병으로 목숨도 잃던 시절에 아버지는 열병으로 왼손과 오른 다리의 자유를 빼앗겼다. 그럼에도 호전적이고 도전적으로 살아오신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서 장애가 부끄럽지 않아 보였다. 어렸을 때는 아버지에게 장애가 있다는 사실도 별로 느끼지 못하고 살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의 몸은 점차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선천적으로 비뚤어진 척추로 인해 허리 디스크와 목 디스크 수술을 수차례 받아야 했고 걷는 것에 점점 제약이 생겼다. 그래도 아버지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통제하기 위해 애쓰셨다. 진짜로 혼자 할 수 없는 것들만 도움을 받고 항상 혼자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셨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결국 그날이 왔다.


언니가 프랑스에서 첫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나는 언니의 출산을 돕기 위해 프랑스에서 3개월을 지냈다. 일은 그 3개월 사이에 터졌다. 귀국하던 날, 언니를 뒤로하고 한국 땅을 밟았다. 그리웠던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다녀왔어”라고 인사를 하는데 아버지의 시선이 이상했다. 묘하게 비껴간 눈으로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셨다. 그러고는 나에게 담담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아빠 눈이 안 보이게 됐어.” 담담한 아빠와는 달리 나는 무너졌다. 내가 프랑스에 있는 사이 아버지의 눈에 안압이 올라가며 원래 있었던 녹내장이 급격히 나빠져 시력을 거의 잃어버리신 것이다. 그로 인해 원래도 제약이 많았던 아버지의 거동에 더더욱 제동이 걸리게 되었고, 아버지는 한순간에 어두운 세상에 남겨져 버렸다.


아버지의 행동반경이 턱없이 줄어들었다. 병원에 가는 일 아니면 밖에 다니는 일이 거의 없어졌다. 몇 번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아버지의 체력이 너무 떨어져 며칠을 앓으시기도 했다. 몇 번 그런 일을 겪으신 아버지는 결국 아버지의 방에서 세상을 꾸려나가게 되었다. 헤이카카오, 지니, 블루투스 스피커, 유투브가 아버지 세상을 구축하는 큰 축이 되었다. 전자기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나뿐이라서 나는 아버지의 세상을 구축하는 유일한 엔지니어가 되었다. 더 좋은 AI가 없을까 고민하면서 검색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놀이터를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매우 까다로운 아버지의 요구를 100% 맞추기는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럼에도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 아버지를 보필하려 애썼다.


애써 담담하게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아버지도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모든 것을 스스로 하려하고 잘되지 않으면 쉬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사람은 아프면 예민해지고 매우 감성적이 되어버린다. 혹여 아버지에게 상처가 될까 싶어 말을 거르고 참으며 그 화를 계속 받아내기만 하니 내 속이 보라색으로 피멍이 들어갔다. 정제되지 않는 말들은 나약한 부분부터 파고들었고, 미처 표정을 살피지 못하는 아버지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 같은 말을 여기저기로 던지셨다. 어머니의 얼굴에 피로가 물들고 내 안에는 감당하기 힘들어질 만큼 분노가 커졌다.


아버지의 말이 쏟아져 내렸다. 속엣말이 잇새를 비집고 나가지 않도록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랬는데 아버지가 트리거를 당겼다. “내가 너한테 뭘 바라겠어! 병 신인 내가 하고 말지.” 악물었던 잇

새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그러니까 나한테 이제 뭘 바라지 마!” 분노가 새어나갔다.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나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하루를 꼬박 울었다. 그래도 멍이 쉬이 빠지지 않 

았다. 유일하게 나와 이 모든 일을 함께 감당하고 있는 엄마에게 그동안 참아온 말을 전부 쏟아내었다. 엄마는 담담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셨고, 앞으로 어떻게 할지를 고민하면서 나의 짐을 덜어주려 애쓰셨다. 몇 번의 부딪침이 있고 나서 아버지도 말을 아끼고 조심하기 시작하셨다. 나도 나의 행동을 한 번 더 돌아보며 아버지와 부딪치는 부분을 줄이기 위해 노력했다.


돌봄의 두 얼굴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해도 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매일매일 새로운 일들의 연속이다. 독특한 가족 구성원 속에서 내 삶에 끼어든 돌봄이라는 치트키는 원치 않았지만 나를 성숙의 단계로 이끌었다. 자유로운 영혼으로 그저 철없이 살고 싶었던 나를 급성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돌보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잘 돌볼 것 같은 사람들을 나눠서 칭찬과도 같은 책임을 떠넘길 때가 있다. “너여서 다행이야.”, “너여서 그 정도 하는 거야.”, “너 정말 대단하다. 나는 그렇게 못해.” 이런 칭찬으로 흐지부지 그 수고로움을 알아주는 척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한동안 ‘너여서’의 감옥에서 착한 아이로 갇혀있어야 했다. 힘들어서 못 하겠다고 뛰쳐나가면 다른 이의 싸늘한 시선을 감당해야만 한다. 이런 인식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누군가를 잘 돌보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은 그만큼 노력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그 희생을 당연하다 여기고 심리적 부담을 몰아주는 일만큼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돌보는 사람은 심신이 많이 지친 사람이다. 몸이 힘든 것은 좀 쉬면 되지만 마음이 힘든 것은 쉰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심리적인 도움도 필요하다. 돌보는 이들에게는 돈이나 물질 같은 현실적 도움도 있어야 하지만 마음을 돌봐줄 누군가가 절실하다. 만성질환자의 가족, 암환자의 가족, 장애인의 가족, 치매환자의 가족 등등, 돌보는 이들을 돌보는 시스템을 촘촘히 구축해야 한다. 우리의 가장 가까운 곳, ‘주변’에 있는 돌보는 사람들을 한 번쯤 돌아봐주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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