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IVF 학사회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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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0-07-21 조회5,205회 댓글0건

[소리정음]
뜻밖의 모험 [우리 동네 이웃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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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리] 2019 두 번째 소리 - 04+05호(통권243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우리 동네 이웃살이]


▷ (1) 직업을 말해줘 _ 전전

▶ (2) 뜻밖의 모험 _ 김남산

▷ (3) 언덕위광장 작은도서관 이야기 _  남태일

▷ (4) 어쩌다 만난 천왕마을 이야기 _ 서진미






뜻밖의 모험

- 강원도 춘천 교동기타&홈그로운 로컬뮤직재배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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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기타 & 홈그로운 로컬뮤직재배소의 공연 모습


 

◆ 김남산

IVF 출신이 아닌 이방인으로, IVF에서 일하던 아내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2008 전국수련회에 참석해서 김병년 목사님의 룻기 강해를 듣거나, 

아내를 따라서 뻔뻔하게 IVF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입니다. 

현재는 GBT를 통해 선교사의 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음악을 할 수는 없을까?’ 다른 누구를 위함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가 음악을 하고 싶으니까. 


2014년 한국선교훈련원(GMTC)에서 훈련을 마쳤지만, 선교지로 떠나지 못하고 춘천에 남았습 니다. 하던 일과 살림을 모두 정리한 후에 선교훈련을 다녀온 것이어서 당장 먹고사는 일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이는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그전까지 해왔던 기타 레슨에는 조금 지쳐있었고, 음악에 관련된 일을 안정적으로 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닥치는 대로 아무 일이나 해보기로 했습니다. 처음 얼마 간은 1톤 탑차를 끌고 격·오지를 오가며 유통 및 영업 일을 했지만 저와 너무 맞지 않아서 제재소에 새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포크레인과 지게차, 여러 종류의 톱과 대패 같은 다양한 연장들, 그리고 격렬한 노동. 이전에 경험했던 삶과는 좀 달랐지만 그래도 성실히 땀을 흘리고 그에 대한 대가를 얻는 기분은 나름대로 괜찮았습니다. 


단순 노동은 말 그대로 비슷한 일의 반복이었습 니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늘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입니다. 점차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제재소 일을 하는 사람 중에는 젊은 사람이 거의 없었고, 대부분 수십 년간 이 일을 해온 60~70대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삶은 저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삶.’ 사실 우리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비전이 없는 삶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분들은 대부분 성실히 일해서 자녀들을 키워 낸 분들이었습니다. ‘나는 이분들처럼 살 수 있을까?’ ‘시간이 지나도 달라질 것이 없는 삶에 복음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혼란했습니다. 


유통·영업 일을 하며 만났던 사람들, 제재소에서 함께 땀 흘린 아저씨들. 이분들은 제 주변의 평범한 이웃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은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저를 포함한 이런 사람들을 과연 하나님이 돌보시는가?’라는 생각을 떨쳐내기가 어려웠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라면, 과거에도 오늘도 미래에도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그런 하나님의 돌보심을 현재의 삶에서도 경험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하나님 나는 당신께 무엇입니까』, 『고통의 문제』, 『고통과 은혜』, 『바람 불어도 괜찮아』처럼 고통과 관련된 책들을 줄줄이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현재의 평범한 삶’ 이 저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던 것이겠죠. 저 자신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세상적인 기준의 성공한 미래와 더 풍족한 내일을 바라며, 정작 현재를 살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다시 음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제재소 일이 힘들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할 수 있는 만큼만이라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현재에서 삶을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브래넌 매닝의 『신뢰』에서 읽었던 “nowhere”, 어디에도 없는 지금(now)과 여기(here)의 삶을 생각하며, ‘지금, 이 순간의 음악’이라는 모티브로 작업실을 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동네 골목 안에 있는 음악 구멍가게 ‘교동기타 & 홈그로운 로컬뮤직재배소’를 시작했습니다. 


작업실을 열면서 ‘함께 참여하는 공간’이 되길 바랐습니다. 여러 해 동안의 레슨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사람들은 단지 한 명의 수강생이나 손님이 되기보다 ‘함께하는 문화 경험’을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동네 가게에서 핫도그나 커피를 사먹는 것처럼 ‘문화 경험’을 팔기 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문화경험을 하려면 서울이나 다른 특별한 곳을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 동네 춘천에도 음악을 들려주기 원하는 뮤지션이 있고 음악을 듣고 싶은 소비자들이 있습 니다. 우리 지역에서 키운 농산물을 사고파는 ‘로컬푸드 직매장’처럼 음악을 사고팔 수 있는 시장이 생긴다면 우리 동네에서도 음악적 소통이 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으로 춘천문화재단에 기획서를 냈습니다. 다행히 지원을 받게 되어서 매주 우리 동네에서 인디뮤지션들의 음악을 파는 공연을 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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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평 남짓한 공간 홈그로운에 모인 사람들
 


운영은 쉽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찾아 오도록 홍보하는 일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새롭게 시작하는 지방의 작은 공간에서 음악을 나눌 뮤지션을 섭외하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홈그로운 은 20명 정도 함께할 수 있는 10평 남짓의 작은 공간으로, 사람들이 모이면 다함께 둘러앉는 형태가 됩니다. 저는 이곳이 내 집에 모인 것처럼 연주자 와 관객의 구분 없이 모두가 참여자가 되어 소통 하는 공간이 되길 바랐습니다. 그러면 ‘뮤지션과 감상자 사이에서 좀 더 의미 있는, 지속될 수 있는 소통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기대였습니다. 그전까지는 이름도 몰랐던 뮤지션이지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과 달리 뮤지션과 감상자 모두 이러한 공간을 어색해했습니다. 서로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작은 공간에서 모르는 사람과 함께 하는 것은 종종 ‘불편한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확보해야 편하다고 여깁니다.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것은 종종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엘리베이터에 나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함께 타기만 해도 우리는 쉽게 불편함을 느낍니다. 이 ‘불편함’을 극복 하는 일이 홈그로운을 운영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저는 홈그로운을 찾는 이들에게 불편 함을 권해야만 했습니다. 함께하는 일의 불편함을 변호하는 때도 많았습니다. 불편함은 함께 하는 경험, 의미 있는 소통을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장애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위해 시작한 공간이었는데, 어떻게 하면 ‘함께’ 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나면 대부분 제가 기대했던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불편함을 넘어서 의미 있는 소통이 이루어지면 함께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경험이 되었습니다. 홈그로운 공연은 한 시간 정도 진행했는데 그중에는 ‘이야기하는 시간’이 꽤 많습니다. 뮤지션이 이 노래를 만들게 된 이야기나 음악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곤 했는데 공연을 보러 오신 분들도 같이 대화하는 분위기가 되곤 합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나눔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공연을 보러 오시는 분들 중에는 아이 엄마, 동네 아저씨, 저희 어머니 연배의 아주머니들이 많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분들이 저희 공간에 찾아오시리라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근처에 한림대학교가 있기에 문화소비에 적극적인 대학생들이 주로 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과 달리 문화적 소외계층이라고 부를 수 있는 분들이 오신 것입니다. 나이 드신 아주머니와 아저씨, 엄마와 아이, 고등학생들, 20대 청년들이 같은 음악을 들으며 함께 소통하는 것은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가게를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은 피드 백은 ‘힐링’입니다. 한 번은 연세가 지긋한 아저씨가 골목을 지나다 가던 길을 멈추고 음악을 듣고 계신 일도 있었습니다. 아내가 그분을 청하러 갔는데, 그분은 “그냥, 좋아서…. 너무 좋네”라며 한참이나 음악을 듣다가 가셨습니다. 동네 주민에게 문자를 받은 일도 기억납니다. “우리 동네에 점집이 많아서 늘 굿소리만 들렸는데, 음악 소리가 나니 너무 좋아요. 꼭 오랫동안 잘 되었으면 좋겠어요.” 옆집 아저씨가 빙수를 사들고 왔던 일도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상선을 타고 항해를 하다 은퇴한 분이었습니다. 70세쯤 된 분이지만 같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없어서 외로우셨는지, 종종 저희 작업실에 찾아와 한참이나 얘기를 하시곤 했습니다. 애들 키우느라 공연 같은 건 꿈도 못 꾸는 아이 엄마들을 위해 브런치 콘서트도 열었습니다. 저는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러한 위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홈그로운 공연이 ‘비통한 자들을 위한 음악회’가 되기를 속으로 바랐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저의 삶의 방향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종교적 틀 안에 제한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른 신들과는 달리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현장은 삶의 한가운데입니다. 저도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하나님 삶’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삶’ 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은 ‘더불어 함께’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한 소망 안에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또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은 개인에게 주어지지만 결코 한 개인에게서 끝나지 않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몇 년 간의 여정은 저의 믿음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이웃과 함께 현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 입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 는 단순한 진리가 제 삶 가운데 녹아들기 시작했다고 느낍니다. 


“나는 아닐 거라 여기던 모든 게 

남들과 다르지 않아서 

기대하는 날보다 실망하는 날이 많아지면 어떻게 해야 할까 

꿈꾸던 어린 시절과 

아무래도 다른 시간을 보낸 나를 보아도 뒤돌아보지 않으며 후회하지 않아 

내 인생을 걸어가 끝도 없는 여행을 떠나” 


홈그로운에서 공연했던, 친한 동생이기도 한 싱어송라이터 이민규의 ‘여행’이란 곡의 노랫말입니다. 삶은 계획한 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가 많습 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삶을 되돌아보면 하나님의 섭리와 인도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제가 의도하지 않았던 시간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저를 인도하신 곳은 평범한 삶의 한가운데였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보게 하셨습니다. 2년 정도 동네 골목에 열었던 음악상점 ‘홈그로운 로컬뮤직재배소’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사실 실패였다고 할 수 있습 니다. 계획했던 공연의 반도 안 되는 공연만 진행됐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하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경험들을 통해 저는 현재의 삶에서 이웃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 중 하나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삶이 ‘서로의 삶이 접촉되는 불편함’을 거부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과제,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바라보며 담담히 이 길을 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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