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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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0-07-21 조회4,917회 댓글0건

[소리정음]
본부장과 팝콘튀김러 사이 [이직(移職)의 바람이 불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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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리] 2019 첫 번째 소리 - 02+03호(통권242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이직(移職)의 바람이 불 때]


▷ (1) 나는 왜 프로 이직러가 되었나_연응찬

▶ (2) 본부장과 팝콘튀김러 사이_김효주

▷ (3) 이직을 준비하는 당신에게_김현수

▷ (4) 커리어와 이직에 대하여_오규덕 






본부장과 팝콘튀김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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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주 고려대99 

직장 생활하기, 책 읽기, 달리기를 좋아한다. 

10년 9개월 동안 다닌 E사를 퇴사했고, L사에서 1년 남짓 일하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아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딸과 함께 일산에서 살고 있다.




본부장. 한때는 칠십여 명의 직원들이 날 저런 이름으로 불렀다. “본부장님”하면 ‘아이구, 인간 김효주. 참 출세했네!’ 싶으면서도 황송함에 몸 둘 바를 모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본부장으로 영광스럽게 퇴사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퇴사할 때 내 공식적인 보직은 ‘테마파크 식음 프로젝트 팀원’이었고, 주 업무는 업장 내 부스에서 팝콘을 튀기고 슬러시를 용기에 담아 고객들에게 건네는 일이었다. 본부장에서 팝콘 튀기는 사람으로 옮겨가는 이야기가 내 이직 이야기다. 


E 회사는 ‘경영자’라는 자원을 높게 평가하는 곳이었다. 경영자는 회사의 경영과 관련하여 최고 의사결정을 내리고 전반을 관리·감독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대부분의 회사가 경영자를 조금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사실이지만, 회사나 업종에 따라 개발자나 디자이너 등의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전문가)를 더 우대하는 곳도 적지 않다. 스페셜리스트가 담당하는 영업, 기획, 디자인, 회계 등의 다양한 실무 경력이 있어야 경영자라는 직책을 맡을 수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내가 다녔던 E사를 보면 유독 제너럴리스트(generalist), 그중에서도 경영자를 더 중요한 자원으로 우대했다. 제너럴리스트는 ‘만능인, 모든 일을 잘하는 사람’ 정도를 의미하는 단어지만, E사에서는 스페셜 리스트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되곤 했다. 만능인 제너럴리스트와 경영자가 되기를 촉구하는 E사의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드는 의문. “근데 뭐든 다 잘하는 사람은 결국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사람이라고 안 했나?” 


나는 그런 분위기의 회사에 ‘전략기획’이라는 직무로 입사해서 여러 부서를 거치며 기획 업무를 했고, 또 신사업부의 전략기획실장까지 맡고 있었다. 그런 내게 ‘큰 사업부는 아니지만 독립사업부의 본부장으로서 경영 업무를 맡아보겠냐’는 제안이 온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나쁘지 않은 일’이라고 시크하게 말하기에는 과분한 제안이었다. 여기저기 들이대는 쌈닭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나에게 그야말로 회사가 주는 기회였다. 


결국 하겠다고 했지만 마음 깊숙한 곳의 진심으로는 정말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생각보다 단순한데, 이력이 꼬이기 때문이었다. 막연하게나마 언젠가 이직을 하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나에게 이력관리는 중요한 요소였다. 사실 그걸 깨달은 건 6~7년 차 무렵이다. 입사 직후에는 하고 싶은 일은 다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영업 관리에 브랜드 론칭으로도 모자라서 인사팀에까지 몸을 담았다. 6~7년의 시간이 흘렀을 때쯤, 이미 너무 많은 경력을 꼬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몇 명의 헤드 헌터를 만나 들으니 “영업과 기획과 인사를 어떻게 일관된 경력으로 쳐줄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했다. “뽑고자 하는 직무와 관계없는 이력들은 도움이 안 돼요. 오히려 나이만 더 먹었다는 평가를 받기가 쉽죠.” 그런데 본부장까지. 제 아무리 경영자라고 해봐야 회사 내에서나 명함이지 회사 밖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스킨십과 승진은 후퇴가 없다고 했던가. 꼬이는 이력에 본부장이라는 직함. 게다가 ‘상위직무를 경험하면 그 이전의 일은 하찮게 취급하는 회사 내의 권위적인 분위기’까지 얽히면, 오, 정말 ‘노답’이다. 


내가 생각하는 경영자는 맡은 ‘역할’의 이름일 뿐 ‘권위’가 아니기 때문에, 경영자는 경영자의 할 일을 잘하면 되고, 보직이 바뀌어 역할이 바뀌게 되면 다시 바뀐 역할을 잘 수행하면 된다. 열왕기상 18장에 오바댜가 나온다. 그는 아합의 궁내대신이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하다고 하는 아합 의 통치 하에서도 선지자들을 숨겨주었으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회사의 분위기와 문화가 어떻든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하는 마음으로 나는 10년 차에 본부장이 되었다. 


본부장으로서 한 일들 중 기억에 남는 게 몇 가지 있다. 새로운 부서의 전체 직원은 칠십여 명인데, 점장과 본부 직원들 약 이십여 명만 한 달 에 한 번씩 모여 월 정기회의를 했다. 지점별, 부 서별 피드백과 계획을 공유한 뒤 마지막에는 “뚜둥!” 본부장의 강의 시간이 있었다. 대체 몇 살 차이도 안 나는 직원들에게 왜 나 따위가 강의를 해야 하는 걸까. 이전 본부장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 이었다고 했다. 저 직원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본부장의 얼치기 같은 얘기를 두 시간이나 듣고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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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번은 나름의 주제를 준비해서 열심히 공유하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내가 진짜 알려주고 싶은 것은 ‘직장에서의 일이 주는 즐거움’ 이었다. 이것만이라도 직원들에게 제대로 느끼게 해주고 싶은데 내가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라서, 주변에 좋은 강사를 수소문했다. “일의 가치와 소명의식의 중요성을 잘 알고, 기독교적인 마인드가 있지만 기독교적인 표현 없이 전달할 수 있는 스킬과 경력이 있는 사람.” 다행히 이런 조건에 적합 한 O대표님을 발견했고, 밑도 끝도 없이 SNS 계정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O대표님은 ‘직원들에게 일의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다’는 주절주절한 내 부탁을 흔쾌히 수락하셨다. 4시간여의 강의가 전혀 길지 않았다. 파란만장한 개인적인 인생사까지 들려줄 이야기가 많은 분이었고, 직원들도 좋아했다. 내가 정말 기뻤던 때는, 이 강의에 도전을 받아 퇴사를 결심한 직원과 면담할 때였다. “XX 점장, 너무 아쉽고 나로서는 정말 잡고 싶지만, 지금 XX 점장이 굉장히 잘 결정한 것 같고 본인도 행복해하는 것 같아서 막을 수가 없네요. 잘 될 거예요. 파이팅입니다.” 


이 외에도, ‘남집귀자(남의 집 귀한 자식)’ 프로젝트를 진행한 것이 기억난다. 서비스 업종의 특성 상 직원들이 과도한 고객의 요구에 노출될 때가 있어서 그로부터 보호하는 법적, 제도적, 운영적인 안을 마련하고자 했다. 사업부의 사명선언서를 직원들과 같이 만들어보고자 했던 ‘WHY 프로젝트’도 시도했다. 이 프로젝트는 결국 미완으로 끝났지만 일의 이유와 목적이 중요하다는 뜻을 직원들과 공유하고자 노력했다. 


가장 독하게 했던 일은 ‘지급이 미뤄지는 성과급 받아내기’였다. E사는 당시 현금 유동성 문제에 시달리고 있어서 직원들의 성과급을 주지 못했다. 원래의 지급 날짜에서 2개월이 미뤄졌고 또 2개월, 다시 3개월이 미뤄졌다. 이러다가 다음 해 성과급이랑 헷갈리겠다는 농담이 나올 때쯤, 또 지급이 연기된다는 공지를 받았다. 나는 부장에, 전무에, 인사팀에, 재무팀 등 여러 사람을 만나러 다녔고 나중에는 이 문제가 회장에게까지 전달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지급이 미뤄져야 할 이유는 많았고 받아내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어쨌든 내가 담당하던 사업부는 대상 부서들 중 가장 먼저 지급이 연기된 성과급을 받았다. 그리고 그다음 달에 나는 업무가 정해지지 않은 채 보직해임이 되었고, 또 한 달이 지나 지방의 놀이공원에서 팝콘을 튀기는 직무로 옮겨졌다. 

 

꼭 언급하고 싶은 점은, 팝콘 튀기는 일 자체는 순수하게 즐거웠다는 것이다. 팝콘을 튀기려면 기계에 옥수수 알과 캐러멜 가루를 넣어야 하는데, 가루 두 스푼이면 맛이 덜했고 세 스푼이면 기계에 그을음이 생겼다. 두 스푼 하고도 1/2에서 2/3스푼 정도를 더 넣어서 가장 좋은 상태의 팝콘이 나왔을 때의 뿌듯함은 아직도 생생하다. 사실들만 나열하면 나는 본부장이었고, 당연한 요구를 당연하게 했고, 그 일은 이루어졌으며, 다음 달 보직해임 되었고, 해임될 당시 다음 업무는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으며, 결국 정해진 업무가 지방발령에 팝콘 튀기는 일이었다. 다만 이렇게 보면 과정이 그다지 정당하지 않았다고 느낄 뿐이다. 


나의 목표 중 하나는 일 년에 한 번은 풀코스 마라톤을 뛰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지방근무를 시작하면서 마라톤 연습할 곳을 찾아야 했다. 대구의 두류공원은 정말, 넓고 경사가 심했다. ‘이거, 보직해임돼서 본의 아니게 기록이 더 좋아지겠는 걸?’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발령을 받아 갑작스러운 주말부부가 되었기에, 이렇게는 오래 못 살 것 같아서 이직을 해야겠구나 싶었다. 이직을 준비하 던 중 건너 건너 지인을 통해 L 회사 대표님의 연락을 받았다. L사는 전략기획이라는 전통적인 직무가 없는 회사라서 가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지만, 만나 뵙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는 분위기 좋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시간 맞춰 나갔더니, L사 대표님은 아직 안 오셨는데 본부장 강의 때 오셨던 O대표님이 계셨다. “아, 대표님! 그동안 소식 못 전해서 죄송합니다. 너무너무 반가워요! 대표님 강의 듣고 저희 직원 하나가 퇴사했는데, 전 그게 그렇게 고맙더라고요. 제가 지금 다른 약속이 있어서 길게는 말씀 드리기 어려운데, 제가 사실 보직해임됐습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서 면접을….” 면접을 앞둔 상황 이라 간략하게 근황을 전하는데, O대표님은 내가 앉아야 할 테이블에 앉으셨다. 알고 보니 O대표 님은 L사의 인사컨설팅을 하고 있었고, 내가 SNS 에 올리는 두류공원 러닝 포스팅을 보았으며, 마침 대구의 병원에서 컨설팅을 하다가 ‘이 인간이 왜 여기서 뛰고 있는 거야?’ 싶었다고 했다. L사 대표님이 말했다. “전에 O대표가 E사에 강의 간다고 하기에 왜 가냐고 물었더니, 효주 씨가 부탁 했다 하더라고.” 


면접인 듯 면접 아닌 면접을 보고 인증샷을 찍은 후, 집으로 가면서 아내에게 연락했다. “그렇게 됐어.” “너 거기 갈 생각 없었던 거 아냐?” “원래는 그랬는데, 만나 뵙고 나니 가야 할 것 같더라고.” 이런 것을 인연이라고 하는지, 홀린 듯 이직 결정을 했다. 지금은 L사에 다닌 지 일 년이 좀 넘어 가고 있다. 십 년 넘게 다녔던 회사에서의 기억은 생각보다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 회사를 나올 때는 뭐라도 하나 뒤집어놓고 나와야지 했던 꼬인 마음도 막상 퇴사할 때는 거의 없었다. 부족하고 괴팍하며 실수도 많은 사람이지만 하늘의 주인이 세심하게 배려해주셨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저 일이 가치 있고 소중한 것이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 이야기는 이게 끝이다. 본부장과 팝콘 튀김러, 그 사이에 있었던 하늘의 인연. 어떤 교훈을 줄 수 있다거나 교훈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더 쓰는 말은 사족일 것이다. 하지만 한 마디만 덧붙인다. 『플랫폼 제국의 미래』라는 걸출한 책을 쓴 스콧 갤러웨이 교수가 커리어에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조언을 했다. “지루한 것이 섹시한 것이다.” 지지리도 경력관리에 서툴렀던 내게 온 좋은 인연은, 모든 업무에서 심지어 지루한 업무에서도 일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걸 기억하려고 애썼던 나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책의 한 구절을 소개하며 이야기를 마무리하려 고 한다.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어느 틈엔가 자기와 같은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들과 만나게 된다.” 아툴 가완디의 말이다. 최근에 읽은 책에는 “건강 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 ‘파이어와처(firewatcher)’ 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었다. 파이어와처란 불이 중요했던 고대 부족에서 불을 피운 후 꺼뜨리지 않는 사람을 말한다. “효주 씨, 이거 딱 우리가 해야 되는 일 아니야?” 매달 책 읽는 기업 L사의 책모임 중에 우리 사장님이 하신 말씀이다. 건강한 조직을 만들려는 사람들이 있다. 직장에서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성장하며 행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하는 것은 의미가 있고 소중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이직의 과정에서 비슷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 을 만났고, 직장생활에서도 일의 의미를 느끼면서 성장해갈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이직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길에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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