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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2-05-02 조회4,956회 댓글0건

[소리정음]
이지문 중위 사건 :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의 시작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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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리] 2022 두 번째 소리 04+05호(통권261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민주주의의 꽃을 피우다


▷ 이중성을 깨닫게 해 준 나의 한 표 _ 이상엽

▶ 이지문 중위 사건 :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의 시작 _ 윤원정 

▷ 정치 참여의 한 가지 방법, 개표사무원 _ 고효정 

▷ 정치의 시기에 언론을 섭취하는 방법 _ 강도현 

▷ 필리핀의 선거와 그리스도인 _ 길버트 테루엘 안드레스  





이지문 중위 사건 : 세상을 보는 다른 시각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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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원정(강릉대90)

다드림교회 집사로, 서울에서 20년째 사업 중. 

(주)루미온코리아 대표이사, CarpenterA 대표. 





선거철이면 생각나는 사건이 있다. 나에게도 청춘이 있었고, 대한민국의 대부분 남자가 그렇듯 그중에는 군 생활이 있었다. ‘이지문’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1992년 3월이다. 밤 9시 뉴스에 깜짝 놀랄 사건이 방송되었다. 당시 나는 학군단(ROTC 32기) 1년 차로, 군기 바짝 든 정신없는 상황이었는데, 선배들로부터 어떤 이야기를 들었다. “29기 선배 한 명이 조직을 배신했다!”는 불평(!)이었다. 정확히 어떤 사건이 벌어진 것인지는 몰랐다. 


나는 졸업과 동시에 임관했다. 백마부대 9사단으로 배치를 받았다.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로 유명한 백마부대, 월남전 파병까지 다녀왔던 백마부대, 한국전쟁 당시 참전 군인들이 지금도 매년 방문하는 유일한 부대로 유명한 백마부대다. 또 한 가지, 장교들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99인맥(9사단 장교 인맥)’이라는 것이 있는 부대였다. 나는 사단 사령부를 거쳐 28연대로 배치되었고, 연대 인사장교의 인솔로 대대까지 배치되었다. 갑자기 인사장교 선배가 별도로 나를 호출했다. “자네 보직이 좀 특별한 자리야. 군 생활 열심히 해라!” 난 그때, 그 말의 의미를 몰랐다. 


초임 장교 시절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갑자기 김일성 사망 소식이 들려왔고, 전 간부 영내 대기 상황이 몇 주간 지속되었다. 어느 정도 상황이 잠잠해지면서, 우리 중대에 신입 중사가 배정되었다. 우리 중대 하사관으로 근무하던 포반장이 전역하면서 새로운 중사 계급의 하사관이 중대 포반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중대 일직사관 근무 때, 그 포반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포반장이었던 조성호 중사는 갑자기 “2소대장님! 소대장님은 소대장님의 전임이었던, 이지문 중위 사건을 알고 있나요?”라며 이야기를 꺼냈다. “사실 저는 그 사건 때, 제가 이지문 중위의 전령이었습니다”라고 했다. 조 중사는 우리 중대의 병사로 근무하다가 장기복무를 신청하여 하사관으로 임용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이 본 ‘이지문 중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건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다가올 국회 의원 선거에서 집권 여당 쪽에 투표하라”는 상급자(연대장, 대대장)를 통한 압력이 있었고, 이를 수행하지 않은 중대장에게는 기무사 장교의 면담 이 있었다. 당시 사건의 중심에 있던 6중대 중대장(김병수 대위)을 비롯한 중대원 몇 명은 전라도 광주 출신이었다. 김병수 대위는 대대급에서 내려온 정신교육을 실시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기무사 장교와의 면담 이후 중대장에 의한 선거 관련 정신교육이 진행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2소대 장이었던 이지문 중위가 ‘군 부재자 선거 관련, 현역 장교의 양심선언’을 한 것이다. 이지문 중위의 사진은 ‘배신자’라는 팻말과 함께 위병소(군부 대 출입문)에 걸렸고, 장교로서 가장 치욕적인 ‘이등병 불명예 전역’이라는 처벌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중대장 김병수 대위의 후임으로 새로운 중대장(H 대위)이 부임했는데, 아마도 그분의 적극적 활동(?)으로 이지문 중위에 관한 평가가 혹독했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김병수 대위와 H 대위는 육군사관학교 동기생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 사건의 진실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에서 열람할 수 있는 진술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본문 하단에 해당 진술서를 첨부한다) 내가 들은 조 중사의 이야기와 완벽히 동일했다. 조 중사는 추가적으로 이지문 중위가 어떤 소대장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진술서에 기술되지 않았던 부대 상황에 대해서도 말했다. 이 지면에 모든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말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정확하지 않은 부분은 관련자에게 오해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이지문 중위를 직접 만나서 겪은 적이 없어서 그에 관해 정확한 평가를 할 수는 없다. 다만 나중에 이지문 중위는 복권되었고, 최연소 서울시의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 중사는 자기네 소대장이 소대장으로 역할을 충실히 하였고, 부하들을 무척 아낀 장교였다고 기억했다. 자신의 소대장이 어떻게 부하들과 지냈는지 여러가지 사례를 들어 이야기했다. 그날 밤 내가 들은 이야기는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중위로 진급했을 때, 부대는 ‘사단 연락장교’로 중위급 장교를 파견하는 관행이 있었다. 대대별 순번이 있었는데 우리 중대 차례가 되었고, 유일한 중위 계급인 내가 ‘사단 연락장교’로 파견되었다. 사단 지휘통제실 근무 중, 우연히 비밀문서를 전달하기 위해 육군본부까지 가게 되었다. 나와 같은 일정이 있는 사단 인사장교 중 한 명이 함께 가기로 되었기에, 배정된 차량 앞에서 그 인사장교를 만났다. 명찰을 보았고, 순간적으로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이지문 중위 사건 당시 우리 중대의 중대장이었던 ‘김병수 대위'였다.   


마음속으로 ‘제발! 내가 어느 소속인지 묻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 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김병수 대위와 인사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네 소속이 어딘가?”라는 질문이 들어왔다. 어쩔 수 없었다. “예, 28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 입니다.” 순간, 그분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도 그분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이해하고 있다. 당시 김병수 대위는 사단 인사처에 근무하면서, 자신의 부하 장교였던 이지문 중위의 복권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분과 별다른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그저 점심때 좀 비싼 음식을 함께 먹었을 뿐이다.


사단 지휘통제실 근무에서 연락장교는 3교대 근무를 하였는데, 지휘통제실 일직근무에는 대위급 장교도 함께 근무하고 있었다. 대위급 장교 중 작전과, 정보과 장교들이 순번대로 근무를 하던 중, 김병수 대위의 후임이었던 대위급 장교(H 대위)와 함께 여러 번 근무하게 됐다. 당시 연락장교 3명은 모두 학군(ROTC) 동기생이었다. 동기들 간에 함께 근무하는 상급자에 대한 평가를 했는데, H 대위에 대한 평가도 있었다. 나는 그분이 어떤 스타일로 중대장 생활을 했을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그분과 함께 근무하는 날은 좀 힘들었다. 3개월간의 연락장교 생활을 마치고 소속부대로 복귀했고, 다시 소대장 생활을 했다. 복무 중 해당 사건 이후 처음으로 ‘군 부재자 투표’가 진행되었다. 주변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주변의 눈초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선거 관련한 어떤 언급도 없었다. 너무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모두가 침묵했다. 전임자의 사건으로 우리나라 군 내부에서 부정선거는 완벽히 사라졌다. 최소한 내가 경험한 곳은 그랬다. 몇 년 전, 영 화 ‘변호인’에서 이 사건이 다루어졌는데(영화에서는 윤 중위로 표현되었다), 배경으로 등장한 장면을 보면서 ‘이 사건이 그 정도였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전임자였던 ‘이지문 중위’가 어떻게 소대장 생활을 했을지 어느 정도 감이 왔다. 그 선배가 만들어 놓은 부대 문화를 느낄 수 있었고, 나 역시 그 문화를 이어가고자 노력했다. 병사 입장에서 장교는 다가가기 힘든 존재다. 그래서 먼저 병사들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의 모습을 나도 닮으려고 했다. 최소한 내가 IVF에서 배웠던 삶의 태도는 그랬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군 생활을 통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데, 나 역시 그랬다. 다만, 나의 경우는 사회의 비정함이나 세상의 편견을 알게 된 것이 아니고, ‘나에게 맡겨진 일에 대해 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이었다. 내가 선임자들을 평가하듯 나의 부하들 역시 나를 평가할 테니까. 


아마 50대 이상의 IVF 학사라면, ‘6개대 사태’를 기억할 것이다. 나도 그때 학생이었고, 그 사건이 충격으로 남아있다. 그 사건으로 나는 어느 정도 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것에 포지셔닝(position- ing)되어 있었다. 이지문 중위 사건이 정치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사건의 배경과 처리 과정에는 정치적 요소가 개입되었으나, 당사자는 정치라기보다 민주주의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먼 저였을 것이다. 민주주의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약속은 군을 포함한 어떤 곳에서도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 것이다. 


전역 후 선거 때면, ‘이지문’이라는 이름이 기억난다. 나와는 불과 3년 차이의 선배인데, 내가 그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본인의 행동으로 피해 볼 사람을 생각했을 텐데, 그리고 자신이 처하 게 될 상황도 알았을 텐데 말이다.  


학생 때 소책자로 많은 인기를 누렸던 『내 마음 그리스도의 집』이 기억난다. 모든 곳이 그리스도 의 집이며, 특수 집단인 군에서도 그분을 모셔야 하는데, 나보다 3년 선배인 이지문 중위는 그곳에서 양심선언을 했다. 사실 그의 선배들도 한 번 쯤은 유사한 상황에 직면했을 텐데, 그들은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내가 32기이고, 이지문 선배는 29기인데, 28기, 27기, 26기, 25기의 선배들은 어땠을까? 이 사건은, 강원도 출신으로 정치와는 별 관련이 없고 더군다나 이공계 출신으로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도 없이 살았던 내가 다른 시각을 갖게 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요즘은 SNS가 많이 발달했다. 페이스북을 통해 ‘이지문 중위’를 검색했더니 바로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선배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도 나왔다. 친구 신청을 했고 이어서 연락이 오갔다. 선배는 그동안 내부 고발자, 청렴운동 등 자신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코로나19 상황이 잠잠해지면 얼굴 보면서 만나자는 제안을 해왔다. 내 인생에서 정말 그를 꼭 한 번은 만나고 싶었는데,  <소리>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그와 연결되었다. 이지문 중위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의 전공이 정치외교학이었기에 그렇게 앞장섰을 가능성도 있다. 만나면 물어보고 싶다. 우리는 각기 다른 대학을 다녔는데, 대학원은 같은 대학원을 다녔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인생 참, 인연이 깊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 오픈아카이브에서 발췌한 이지문 중위 사건 자료>

(https://www.kd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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