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소리>는 ‘수준 높은 수다로 꼬드기고 등 떠미는’ IVF 학사회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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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2022-04-28 조회4,821회 댓글0건

[소리정음]
내가 주님과, 주님이 나와 함께한 시간[송구영신(送舊迎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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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소리] 2022 첫 번째 소리 02+03호(통권260호)에 실렸던 글입니다.




송구영신(送舊迎新) 


  한 해를 잘 계획하는 법에 관하여 _ 홍헌영 

  한 해를 마무리하는 나만의 통과 의례 _ 전소라

  내가 주님과, 주님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 _ 김현숙

  우리 가족의 챕터캠프 _ 유지은

 코로나 시대 간사의 삶, 다시 돌아온 한 해 _ 김주완





내가 주님과, 주님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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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어 묵상하고 있는 욥기 본문
                                                                                                                                                                                              


◆ 김현숙(이화여대94)

날마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 IVF 간사와 「시냇가에 심은 나무」 필진으로 섬겼다. 

IVFer인 남편과 아들, 딸이랑 살고 있다.  




큐티, TWG  


Quiet Time. 누군가는 이 시간을 TWG(Time With GOD)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과의 약속이기에 다른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시간이고, 누군가 그 시간을 요구할 때면 ‘선약’이 있다고 한다 했다. 오래전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나는 지금도 큐티가 뭘까 생각할 때 이만한 말을 떠올릴 수가 없다. 고요하기만 한 시간은 아니고, 그저 말씀만 보는 기계적인 시간도 아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시간이다. 


큐티의 시작 


아마도 여름 수련회 이후였을 것이다. 그전에도 큐티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을 텐데 정말이지 그 수련회 이후 나는 꼭 큐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확히 언제 어느 수련회였는지, 무슨 강의 나 설교를 들었는지, 강사가 누구였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큐티를 ‘했던’ 것은 기억난다. 결심과 열망이 너무 큰 나머지 집에서 시작하지도 못하고 수련회 다음 주, 방학 중인데도 큐티를 위해 학교 기도실로 찾아갔다. 거사(?)를 치르고, 따스했던 기도실의 햇살을 만끽하며 꿀잠에 빠지기도 했던 바로 그 시간. 그것이 바로 내 기억의 ‘시작’이다.  


사실 그때 이후로 큐티를 매일 빼먹지 않고 했다든가 너무 은혜가 많아서 큐티 간증이 넘쳤다든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열정 과다로 금세 지쳐서(방학 중에 학교에 가서 큐티를 할 계획을 세우다니!) 규칙적인 큐티는 물 건너간 이야기가 되었다. 그래도 그때였다. 내 삶에 큐티라는 큰 주춧돌이 생긴 것은. 그리고는 올라감과 내려감, 충만함과 메마름을 지나가며 그렇게 함께 해왔다. 


바쳐진 시간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이 늘 성공적이지는 않았다. 일상은 분주했고, 할 일들이 늘 먼저인 순간도 있었다. 한가하고 편할 때는 안일해졌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매일 만남, 그 고요한 시간이 나를 서서히 만들어 가고, 나는 조금씩 그 시간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형식은 본질을 규정할 수 없지만, 본질로 인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시간이 중요했다. “주야로 묵상하라”는 말씀은 ‘묵상’에만 초점을 둔 명령이 아니다. ‘주야’가 필요하다. 시간을 들이지 않는다면 잘 기도할 수 없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기 어렵지 않은가. 시간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알게 해준 사건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둘째 아이를 여름성경학교에 데려다주고 나오는 길에 한 분을 만났다. 아이들 덕분에 안면은 있었지만 많은 대화를 나눠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성경학교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동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정말이지 사랑이 많은 분이었다. 자신은 아이들을 키우며 한 번도 힘들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이들을 간절히 원했고 키우기 원했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셔서 정말 감사할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큐티를 잘하지 못하고 있어. 하면 될 것 같은데, 아침에 애들을 보내고 나면 집안일을 해야 하고, 그러면 또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이 돼. 오후에도 비슷하고.” 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부담감 때문에 다른 학부모들과 만남이 잦아지면서 중심을 잡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게다가 1학년은 얼마나 집에 빨리 오는지.


“언니, 알람을 맞춰 봐요. 도움이 될 거예요.” 나는 문득 알람 얘기를 꺼냈다. 나는 벨소리가 싫어 핸드폰을 거의 진동으로 해놓고 지낸다. 하지만 여러가지 일깨워야 할 일이 많은 나는, 기도 시간을 비롯한 많은 일에 알람을 사용하고 지냈다. 언니는 그건 전혀 생각지 못했다는 듯 내 말을 들었다. 한 달 정도 지나서 마주친 언니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한 달’이었다. 길에서 만난 내게 먼저 와서, 다른 사람들과 약속도 줄이고 알람을 맞추어 큐티를 시작했는데 정말로 흔들리던 삶이 평화로워졌다고 고백했다. 그녀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고 들으며 살고 싶었지만, 분주함과 불안함에 밀려 그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알람은 도구에 불과할 것이다. TWG를 지키겠다는 약속을 상기시켜주는 것뿐이다. 그런데 그런 작은 행동과 마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을, 나는 그날 보았다. 하나님께 바쳐진 구별된 시간이 주님께는 TWU(Time With U), 주님이 나와 함께하는 시간이 된다. 


날마다


한 해의 끝과 시작을 마주하고 있다. 이 시즌이 되면 어릴 적 졸린 눈을 비비면서 엄마 따라서 갔던 많은 송구영신 예배가 생각난다. 촛불예배였는데 예배를 마친 후 예배당에 가득 찬 매캐한 연기, 졸다가 결국 촛불에 머리카락 태운 일도 생각난다. 예배 끝나고 새해 인사를 하는 우리에게 목사님이 세뱃돈을 주신 일도 있었다. 이제 설교나 예배의 디테일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그런 예배들이 지나간 해와 오는 해를 나누고 감사하게 하고 새로 시작할 힘도 주었다. 대학생 때나 간사 활동을 할 때는 수련회에서 송구영신하며 뜨거운 마음으로 새해 결심을 한 적도 많았다. 지금은 그때와는 사뭇 달라졌다. 여전히 송구영신 예배는 드리지만, 어쩐지 시즌에 대한 감각이나 감흥은 줄어든 느낌이다. 날짜 감각도 둔해지고, 새해 계획도 크지 않다. 삶은 단순해졌고,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이 더 많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주님과 함께 하는가?’ 눈에 띄는 결심과 목표를 세우지 못했어도, 나는 매일 주님이 필요하다. 올해의 말씀도 일용할 양식도 필요하다. 어릴 때 새해 결심은 ‘매일 큐티’ 이런 거였는데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결심을 반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또 새해가 되어도, ‘날마다 주님과 함께’를 떠올리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남들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내면이 지저분하다는 게 문제다. 늘 인정 받고자 하는 욕구가 똬리를 틀고 있고, 남이 잘하는 것을 보면 시기하고, 가족을 이룬 지금은 허물 많은 내 모습으로 자녀에게도 상처와 아픔을 줄 때가 있다. 조급함은 복병이고, 게으름은 단골손님이다. 이런 씨름은 몰아서 해서는 안 되고, 날마다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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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주님과 함께하기를 꿈꾸며
 


묵상


요즘은 ‘욥기’를 묵상하고 있다. 사실 내게는 무척 어려운 본문이다. 문학적인 표현들, 반어법, 비슷한 내용처럼 보이는데 차이가 있는 그런 것들을 모두 분석적으로 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느끼고 곱씹고 또 질문한다. 욥은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은 사람이고 인내의 표상인데, 그가 친구들과 하나님 앞에 내뱉는 말들은 전혀 의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의 과한 자신감에 동조했다가 멀어졌다가, 나는 그렇게 기도해도 될까, 그런 기도는 옳은 것일까, 의문을 달아 본다. 친구들의 논리가 다 틀린 얘기는 아닌데 하면서 갸웃거렸다가, 욥이 하지도 않은 일까지 했다고 하면서 모욕하고 정죄하는 모습에는 기가 찬다. 또한 하나님은, 욥의 입장에 가장 궁금했을 ‘고난의 원인이나 이유’에 대한 얘기는 한마디도 안 하신 채, “네가 아느냐?”, “네가 할 수 있느냐?”라는 질문을 쏟아부으신다. 그리고 욥은 그 질문에 그 역시 “모른다, 못한다”라는 직설적인 대답이 아니라,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내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욥42:5~6)라고 말한다. 자신의 이해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전능함과 초월성, 신비한 섭리 앞에 무릎 꿇는 욥이다. 이제 그에게 고난의 원인이나 자신의 의로움에 대한 인정은 큰 문제가 아니다. 때로는 확실한 해석이나 정답은 몰라도 하나님 그분만으로 충분한 순간이 있다. 욥처럼. 하지만, 이후는 또 어렵다. “너희가 나를 두고 말을 할 때에, 내 종처럼 ‘옳게’ 말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42:7). 이 말씀, 고난도 롤러코스터다. “네가 자신을 옳다고 하려고, 내게 잘못을 덮어씌우려느냐?”(40:8)고 하신 분이 회개까지 한 욥에게 “내게 대해 옳게 말했다”라니. 주님이 옳다고 보시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말씀 묵상의 시간에는 확실한 깨달음과 응답이 오는 때도 있지만, 더 많은 순간은 그저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때로는 욥기 묵상처럼 좌충우돌의 시간이다. 그래도 뭐, 좋다. 욥도 그랬으니까. 욥이 그분의 높으심을 눈으로 보기까지 시간이 걸렸지 않은가. 부인과 친구들에게, 자기 자신에게 시달리고, 친구들과 하나님을 향해 항변했던 오랜 시간. 했던 얘기를 또 반복하는 것처럼만 보였던 욥과 친구들의 지루한 이야기가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들을 때까지 거칠 수 있는 어떤 시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욥은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 같은 하나님을 향해 한탄하며 힘들어했지만, 하나님의 마지막 모습은 하나님이 한 번도 욥을 떠나신 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내 뜻대로 응답을 받을 수는 없지만, 그분이 무엇보다 크시다. 시간이 걸려도 묵상을 통해, 매일매일 조금 더 주님께 나아간다. 아무 말 없어 보여도, 주님의 타이밍은 정확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 


큐티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시간 말하고, 듣고, 자라간다. 오래 했어도, 해가 바뀌어도, 매일 엎드려도 완성되거나 성취되는 것은 아니다. 그저 달기도 하고 고통스럽기도 하고, 잘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한다. 계속 그럴 것이다. 나도 여전히 애쓰는 중이다.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그러나 욥이 주님을 대면하기까지 오래 걸렸다면 우리도 인내해야 한다. 완벽해 보이는 욥도 부족했으니 내 부족함은 받아들이고, 끝까지 주님을 놓지 않았던 욥의 믿음을 따라가야 한다. 욥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나타나신다. 우리가 그분을 이용하는 대신, 경배하고 그분만 바랄 수 있는 마음이 있기를 원한다.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하지 아니하고 내 눈이 오만하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감당하지 못 할 놀라운 일을 하려고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영혼으로 고요하고 평온하게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의 어머니 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영혼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시 131:1~2,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주님, 오늘도 함께해 주시고, 내일도 함께해 주세요.”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은 모두에게 축복이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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